무엇을 먹는지 살펴보면 '우울증'을 알 수 있다
무엇을 먹는지 살펴보면 '우울증'을 알 수 있다
김병수정신건강의학과 김병수 원장
무엇을 먹는지 살펴보면 '우울증'을 알 수 있다
정신건강을 알려주는 객관적 지표 중 하나는 식습관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에게 “식욕은 어떠세요?”라고 꼭 물어본다. 우울해지면 먹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 심하면 몸무게가 줄어든다. 체중이 5% 이상 감소하면 유의미한 우울증상 중 하나로 간주한다. 우울증에 빠지면 의욕과 흥미가 사라지니 식욕도 줄어드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지겠지만 그 반대 양상도 흔하다.
식욕이 증가하고 폭식하는 환자도 있다. 부정적인 기분 때문에 괴롭다고 하면서 평소보다 오히려 더 많이 먹으니 주변 사람들은 ‘진짜 우울증이 맞나?’하고 의구심을 갖는다. 주요우울장애의 15-30%를 차지하는 비정형 우울증은 오히려 많이 먹고 많이 자는 게 특징이다. 신체 건강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 식욕 변화가 생겼다면 우울증이 아닌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우울증 환자들에게 식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떼웠더니 살이 쪘어요!”라는 대답을 종종 듣는다. 반대로 우울증에서 벗어나면 배달음식을 덜 시켜 먹고 손수 음식을 차려 먹기 시작한다. 거창한 요리는 아니라도 몇 가지 간단한 밑반찬으로 집밥을 해먹는다.
그러다 우울증이 악화되면 어김없이 배달음식을 더 자주 시켜먹기 시작한다. 반찬 만들고 국을 끓일 기운도 없는 상태에서 스마트폰앱이 쉽게 음식을 눈앞에 차려주니 배달음식을 더 먹게 되는 것이다. 활동으로 기쁨을 일궈내기 어려우니 자극적인 음식으로 쾌감을 느껴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무엇을 먹고 있는지 살펴보고, 건강하게 영양을 섭취하는 것도 우울증 치료에 중요한 요소다. 통곡물, 과일, 야채, 견과류, 콩, 살코기, 해산물은 도움이 되지만 탄수화물과 가공식품은 나쁜 영향을 끼친다. 오메가-3, 아연, 마그네슘, 철분, 비타민 B, D 같은 영양소도 우울증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이다.
호주 에디스 코완대학교(Edith Cowan University)에서 25세 이상의 호주 성인 8600명을 대상으로 식이를 잘 관리하면 스트레스가 줄어드는지 조사했다. 과일과 채소를 많이 섭취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스트레스 점수가 10% 정도 낮았다. 야채와 과일에 포함된 비타민 C, E, K, B군과 카로티노이드, 페놀 화합물 같은 생체 활성 영양소가 스트레스를 낮춰줬기 때문이다.
트립토판은 세로토닌의 전구물질이다. 트립토판으로부터 기분을 조절하는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인 세로토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고기, 생선, 콩, 유제품에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고 견과류나 바나나에도 많이 들어있다. 규칙적으로 식사하고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면 문제가 없지만 끼니를 거르고 편식하면 트립토판이 부족해져서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다.
대뇌와 위장관 사이의 조율 기능이 망가지면 우울증에 취약해진다. 우리 뇌는 미주신경을 통해 장과 연결되어 있다. 장내 세균은 신경화학물질의 생성과 분해를 조절한다. 신체에 필요한 세로토닌 중 95%가 장내 세균에 의해 만들어진다. 스트레스는 장내 미생물의 활동에 악영향을 미치고, 이것으로 인해 세로토닌 합성에 문제가 생긴다.
장 건강을 위해 복용하는 장내 유익균을 프로바이오틱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신체건강뿐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중요하다. 캐나다 킹스턴 퀸스대학교의 캐롤라인 월러스 박사는 프로바이오틱스 치료로 기분과 무쾌감증, 수면장애가 호전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연구 참여자에게 인공적으로 스트레스를 유발한 다음에 두 가지 종류의 유산균 (락토바실러스 헬베티쿠스와 비피도박테리움 롱럼)을 혼합해서 복용시켰다.
유산균을 복용한 피험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스트레스와 불안이 덜 느꼈을뿐만 아니라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 수치도 낮았다. 유산균은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처럼 주의력과 의욕을 향상시키는 신경전달물질의 생성에도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게 만드는 GABA의 활성도를 조절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울증 환자는 자신이 어떻게 식사를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경건한 활동이다. 고마운 마음으로 요리를 음미한다. 미각뿐 아니라 시각과 후각을 총동원해서 음식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경험 하나 하나를 느끼며 식사해야 한다.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가 지금 이순간 식탁 위에 올려져 있다고 상상해보자. 허기에 쫓겨 허겁지겁 숟가락을 푹 담글 게 아니라 빛깔부터 천천히 관찰해보자. 모락모락 피어나는 찌개 향기도 느껴본다.
그리고 찌개 안에 들어 있는 두부, 감자, 호박에도 주의를 모아보자. 그리고 나서 국물을 한 수저 입에 넣고 어떤 맛들이 찌개에 숨어있었는지 하나 하나 찾아본다. 식사라는 행위 경험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런 걸 두고 마음챙김 식사(mindful eating)라고 부른다.
식사 시간만큼은 휴대전화를 꺼두자. 유튜브 동영상도 금물이다. 배달 음식을 먹더라도 이왕이면 접시에 정갈하게 플레이팅해서 먹는다. 비록 시켜 먹는 음식이지만 이왕이면 예쁘게 차려 먹어야 식사 경험에 더 몰입할 수 있다.